2009년에 한일고를 졸업한 한명의 학생으로서, 어제 아침 조선일보기사에서 한일고가 일반계 1등이라고 당당하게 신문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는 잠이 확 깰정도로 너무나 기뻤습니다. 입학 전에도, 재학 당시에도, 졸업한 이후에도 언제 어디서나 저와 부모님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한일고였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 기쁨에 한일고 홈페이지까지 방문해보게 되었는데 사실 지금은 약간 씁쓸함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홈페이지 첫 화면에 '일반계 중 전국 최고라는 조선일보 수능 서열에 관한 단상'이라는 제목만 봤을 때, 저는 순간 가슴이 탁 막혔습니다. 그 '단상'의 내용을 보기 전에 저는 이것이 수능을 기준으로 한 일괄적인 고등학교 서열화에 대한 비판일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머리 속에는 이영탁,최근영 선배님이 재학생 사랑방에 쓴 <서울대 합격숫자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글이 떠올랐습니다. 순간적으로 수능이라는 잣대만으로 학교를 평가하는 나의 시각이 부끄러웠고, 한일고 재학당시의 즐거웠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또한 대학교에 입학하고나서 같은 중국어과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모르는 대원외고친구를 보며 3년간의 부대끼는 생활을 통해 서로서로 친밀하고 이과,문과로 다르더라도 최소한 이름과 얼굴은 아는, 끈끈한 우정을 지닌 우리학교를 자랑스러워 했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수능만이 아니라 더욱 큰 무언가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한일고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용을 클릭해보니 '단상'의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고 단지 평가기준이 적절하지 못한것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순간 웃음이 피식났습니다. 그리고는 약간의 씁쓸함이 들었습니다. '우리 학교도 역시 수능이라는 잣대만으로 평가하는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씁쓸함이 비현실적인 것일까요...
아래는 이영탁, 최근영 선배님이 쓴 글 전문.
<3년전 이 사진을 볼 때가 생각이 난다
처음 학교에 입학하기전 선배들의 성적을 보고
그저 학교 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고
주변 사람들도 저 수치만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했다.
하지만 입학하고 졸업을 하는 지금
현수막에 걸려있던 것과 현실은 달랐다.
그동안 선배들이 일구어낸 성적은 하루아침에 번쩍 생겨난게 아니었고
중학교 때 조금 한다는 애들이 그냥 모여서는 이루어낼 수 없었다.
지금은 현수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했지만
어떤 친구는 저기에 4번 5번 이름을 올리고
어떤 친구는 저기에 한번 이름을 올리지 못한 친구가 있다.
어떤 친구는 저기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학과,
대학을 가지 못했다.
졸업하는 지금 그것이 제일 안타깝다.
아마 160명 중에서 입학할 때 생각했던 대학과 목표를 이룬 친구는 몇명 안 될 것이다.
나 역시 애초에 잡았던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이를 본 고향 동네 어른들은
그냥 지역에 있는 학교가서 내신 잘 받고 대학 잘가지 그랬니?
하고 핀잔을 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난
영화보려면 천안까지 걷고 버스타고 1시간이 걸려서 나가고
머리 자르러 15분 걸어 나가야 나오는 것이 고작 촌동네 미용실이었고
남들 다하는 게임 대신에 새벽 6시에 하는 점호가 끝나고 하는 축구를 즐기고
인터넷을 하기위해서는 일주일에 한번 느려터진 컴퓨터실로 달리고
밤에 치킨 한번 먹어보겠다고 나가면 1주일간 시달리고
외식하러 나가는 것이 고작 짜장면집, 가장 좋은 곳은 삼겹살집
1년에 귀성은 한두번 가면서 공부했지만
하지만 학교에서 있었던 세월이 좋았고
한일고등학교라는 곳에서 전국의 친구들을 만나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하며 노가리를 까던 시간 때문에
우리가 아침 점호때마다 외쳤던
"우리는 큰그릇" 이라는 말처럼 큰그릇이 될 자신감이 생겼고
한일고 졸업생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단지 저기에 써있는 서울대 연고대 수치로 우리가
판단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울대 숫자가 얼마 떨어졌네 하는 사실만으로 우리를 평가할 수 없다
우린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바라보아달라
<학교 후배 영탁이가 미니홈피에 올린 글을 무단 도용>
나는 저 사진에 한번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급 장학생으로 입학해서 3년 동안 성적은 바닥으로 끝없이 추락했고,
원하던 대학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아쉽게도 성적과 대학은 당시 내 관심사가 아니었고,
고등학생 신분으로 허락되지 않은 많은 것들이 나를 이끌었다.
한일고등학교는,
그런 나에게도 더없이 훌륭한 교육의 공간이었다.
한일고등학교는 나에게,
괜찮은 대학에 적을 둘 수 있는 최소한의 실력을 갖추게 해 주었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인간적으로도 매력적인 수많은 엄친아들을
친구로 둘 수 있게 해 주었고
성적이 좋지 않아도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배려해 주시는 스승을 주었으며
가을 밤 하늘의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 저 사진에 이름을 올린 많은 친구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더욱 치열하게 노력했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창시절의 목표를 향해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을 나의 후배들에게
내 고등학교 3년 동안의 어긋난 치열함을 권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주변의 친구들과 비교해서 다소 부족한 성적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을
몇명의 후배들에게 이 말만은...
진심을 담아 전하고 싶다.
한일고등학교에서의 3년의 시간이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서울대 합격숫자만은 아니라고,
그것보다 더욱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들이 너무 평범하게 주변에 널려있는 것이
진정한 한일고등학교의 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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