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아이 같기만 한 우리 집 녀석.
그런 녀석이 얼마 전 겨울방학에 접어들면서 스스로 '이제는 중학생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는지
제 방에 3년간이나 붙어있던 축구선수 이동국 브로마이드 - 축구를 넘 좋아해서 - 와
켄트지에다 커다랗게 그려 써 붙인 ‘이동국’이라는 이름을
과감히 떼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안 청소, 걸레질까지 알아서 곧잘 했지요.
아빠가 늦게까지 밤 작업하는 것을 보고는 이따금 먹을 것도 챙겨주기까지 했지요.
이제는 제법 콧수염까지 거뭇거뭇해진 녀석이지만, 그러나 아빠의 눈에는
아직까지는 아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답니다.
새벽까지 아빠가 작업에 빠져 있는 틈을 노려 사전허가(?)도 없이
슬그머니 제 베개를 집어 들고 몰래 안방 제 엄마 옆으로 기어들어가서만은 결코 아니지요.
녀석에게는 아주 못된 버릇이 몇 개 있습니다.
가장 나쁜 버릇, 무조건 제 엄마만을 좋아하는 거.
그래서 아빠가 ‘전형적인 마마보이’라고 놀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지요.
오히려 그 반대로 더 엄마를 더 좋아하기만 하지요.
그래서 나는 은근히 약이 올라 ‘아빠를 싫어하는 녀석’이라고 시기 아닌 시기의 말로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 누나를 몹시 괴롭힙니다.
멋있는 옷도 뺏어 입고, 먹는 것도 빼앗아 먹고,
심지어는 운동화까지 몰래 신고 나가서 사내 녀석 특유의 발 냄새까지 잔뜩 집어넣곤 하지요.
그런가 하면, 제 방은 비워두고 늘 누나 방에 가서 공부를 하지요.
그래서 나는 저 녀석이 단순히 외로움을 많이 타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지요.
또 하나 결코 누구도 못 말리는 것. 친구가 부르면 이 추운 겨울밤에도 축구를 하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생각이 나서 하는 말인데, 녀석은 공만 차고 오면 영락없이 시커먼 흙발인 채 집안으로 들어와 온방을 마구 걸어 다닙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전 같았으면 엄마가 질색을 하면서 난리를 쳤을 터인데, 요즘 와서는 웬일인지 그런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눈에조차 그놈의 흙발이 그다지 미워보이지 않더라, 이겁니다.
나는 단순히 ‘조금 있으면 녀석의 저런 모습도 보지 못하겠구나, 그나저나 녀석이 공주에 내려 가 있으면 내가 좀 심심하겠는 걸’ 하며 넘어갔지요.
내가 무심한 것인지, 아니면 내 일이 바빠서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그도 아니면 너무 무뚝뚝한 남자라서 섬세한 아내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물론 가슴 깊은 곳에는 뭔가 자꾸만 슬금슬금 커가는 것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다 오늘 아래 글을 올리신 조정옥 님의 글을 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가슴 속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전에 없이 안 해먹이던 음식과 몸에 좋다는 약을 해 먹이고...
또한 자주자주 겉말은 ‘모자라는 과목 공부 더 해라’ 하지만 틈나는 대로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했거든요,심지어는 시장에까지 데리고 다녔으니까요.
아이 엄마뿐이 아닙니다.
그토록 아빠를 미워하는 줄만 알았는데
녀석은 요즘 아빠가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시키지도 않은 간식을 자주 챙겨주기도 했습니다.
오늘 오후 엄마하고 밖에 나간 틈,
나는 녀석의 방에 있는 것들을 한번 둘러보았지요.
전에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던 잡동사니들을 보다가 문득 코끝이 시려 옴을 느꼈습니다.
급기야는 뱀 허물처럼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을 을 보고는........나도 모르게 뭔가가 봇물 터지듯....
나는 재빨리 '짜식, 버릇하고는....’
애써 아이를 탓하면서 냅다 손에 집어 들었지요
그리고는 그것을 세탁기에 던져 넣으려다,
문득 옷에서 녀석의 냄새를 맡았지요.
그리고는 또 한번 나도 모르게.....
아빠도 이럴 진데 아이 엄마는 얼마나 더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나는 '몇 년 있으면 군대에도 보내야 하는데 이까짓 거야 뭐...’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늦은 밤, 지금은 모두 다 잠을 자고 있습니다.
나는 하던 일 때문에 아직 잠을 자지 않고 있습니다.
잠시 전, 오늘 역시 제 베개를 들거 가 엄마 턱 밑에 코를 박고 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왔습니다.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이럴 줄 알았으면 아스토핀지, 아토피슨지... 따지지 말고 녀석이 좋아하는햄버거, 치킨이라도 실컷 사줄 걸...'
언뜻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자랑스러운 한일인들아.
너희를 보내 놓고, 너희가 놓고 간 냄새와 흔적들을
접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너희 스스로 세운 그 목표는 반드시 이뤄내길 바란다.
외국 유학을 생각한다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기왕에 선택한 최상의 길인만큼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학교, 자랑스러운 젊은이라는 긍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뜻하는바 목표를 이루길 바란다.
그리고 학부모님들, 한일고등학교의 훌륭하신 선생님들께서 부모 이상으로 알아서 공부시키고 잘 키워줄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아이가 앉아 있던 아이 방의 자리가 결코 빈자리는 아닙니다.
아이가 앉았던 책상, 침대, 입던 옷들, 결코 주인이 없이 있는 게 아닙니다. 잠시 도서관이나 학교에 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세요. 그러다보면 아이가 한결 어른스러워져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의 아이는 생각보다 잘 견디고 생각보다 건강하게 자랄 것입니다.
우리 집 녀석은 엄마를 생각해서 저 스스로 잠시나마 엄마 곁을 떠나 공부하겠다는 각오를 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엄마를 생각하는 점에서는 어느 아이도 다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힘내시고 아이를 믿으세요.
아이는 생각보다 어리지 않을 겁니다.
이상, 신입생 아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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