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석에게
일석아 잘 있니? 아빠도 엄마와 같이 잘 있단다.
한 가지 기쁜 일은 엄마도 이제는 몸이 많이 좋아져 비닐하우스에서 가끔씩 아빠를 도와주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그러니 집 걱정은 말아라. 오늘은 봄기운이 화창하다. 들녘이 생명으로 푸르고 벚꽃도 활짝 피었다. 농사철이다. 올해는 한 번 농사를 잘 지어봐야겠다.
가을에 추수를 많이 해서 올 겨울엔 더 좋은 옷도 한 벌 사주마. 일석아. 너도 열심히 살아라. 애비가 너와 같이 땀을 흘려 올 가을이 풍성할 것 같으니 지금 아빠는 매우 설레고 기쁘다.
지난 설날 귀향 때 네가 집에 다녀갔는데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났구나.
시골 일이 바쁘다고 자주 너한테 가보지 못하니 자못 보고 싶고 미안하다.
다른 친구들 부모는 자주 와서 외식도 시켜준다는데 엄마는 병치레로 가보지도 못한다고 항상 애타하니 이 애비가 못나서이랴 그저 안쓰럽다.
그러나 아빠는 너를 믿는다. 우리 집 종손인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심신을 단련하여 훗날 큰 일을 해 볼 것이란 네 결심을 믿는다. 지금 궁하다고 한하여 비굴하거나 일시 위축되지 말아라.
너에게는 꽃피우고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많은 시간이 있다. 푸른 꿈을 실현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있는 것이다. 청운의 꿈을 품었다 하여 청년이라 하지 않는가!
우리가 아는 역사속의 훌륭함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세월로써가 아니라 자기에게 부여된 시간을 땀흘려 개척한 결실인 것이다.
일석아 너도 이 봄에 꽃다운 꿈을 가져라. 그리고 땀흘려 경작하고 기어이 열매를 맺어보려고 몸부림쳐 보아라. 대지에서 생명이 꿈틀대고 생존을 위하여 바둥쳐 보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고 품위있고, 안전하고, 편리하며 즐겁고 감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공부가 바로 그런 것을 하기 위한 기초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꿈을 꾸고 노력하는 자에겐 반드시 기회와 보람이 있는 것이니 앞날을 일구는 씩씩한 청년기상을 잃지 말아라.
2년전 너는 스스로 꿈과 용기를 가져 보겠다고 한일고등학교를 선택했었지. 아빠는 그때 네가 참으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지금 네가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선생님 말씀도 잘 받들고 있다니 매우 기쁘다. 그러니 일석아, 요즈음 성적이 많이 오르지 않는다고 너무 조급해 하지 말아라. 내가 들으니 선행학습으로 이룬 앞섬은 2학년 말경이면 다 같아진다고 하더라.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다시 생각해보고 진지하고 성실한 너 스스로를 믿어라. 앞으로 시간이 있으니 차곡차곡 열심히 해 봐라.
사람이 크게 성공을 하려면 뭔가 세상에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 세상에 내 놓을 수 있는 명작을 만들려면 월등한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실력이란 것은 지식이란 전문성과 그것을 응용하여 동료들과 같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지혜와 인간성, 그리고 집요한 열정과 굴하지 않는 용기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공부란 남에게 기여하고 봉사하는 것을 더 낫게 만드는 것이지 남을 누르고 작게 이기고 뽐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기여할 수 있도록 내 놓으려면 바로 탐구하고 모색할 수 있는 나의 지혜와 친구의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일석아. 지식과 마음의 찐한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많이 사귀어라. 인생은 가족과 친구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시간은 공평하지만 세월의 열매는 같지 않다. 사람이 마음먹고 노력하고 반성하고 더 힘을 내보거나 그러하지 못하는 과정의 경과에 따라 다양한 천차만별이 자리잡게 된다. 저기 서 있는 밤나무도 좋은 양분을 많이 빨아들이고 태양열을 받아 탄소동화작용을 잘 하면 가을의 토실한 결실이 약속되는 것은 신의 섭리인 것이다.
누가 이러한 신의 섭리를 부정할 것이며, 또한 누가 이를 불공평하다고 투정할 것인가?
너와 아빠는 지금 우리 가정과 세상에 내놓을 그것을 만들기 위해 어떤 영양을 빨아 들여야 하는지 깊이 고심해 보자.
일석아 너는 지금 공부를 잘하는 친구도 조금 뒤지는 친구도 다같이 소중한 것이며 모두가 천부인권적으로 평등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소중하고 평등한 속에 각자의 인생이 있게 되며 모두는 생노병사의 인생 역정 속에 희로애락이 점철되게 된다.
사람이 마음먹고 행동하고 표현하기에 따라 길흉화복이 정해지게 되며 그러한 복되고 복되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가까이 있으며 그런 우리의 삶의 흔적은 때로는 명예롭게 대지에 살아있고 때로는 무모하거나 처참하게 거리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땅위의 생사를 경건히 관조하고 크고 훌륭한 삶을 상기하여라.
일석아, 너와 아빠는 무엇으로 삶을 감사하고 신성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너와 내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섭리로 살아 있는 것은 은혜와 은총인 것이며, 웃고 울고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은 음덕이요 축복이며, 쇠하여 대지로 돌아가게 되는 것 또한 섭리의 영원한 영광인 것이다.
이 위대한 은혜와 은총, 그리고 축복과 영광을 우리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 것인가?
옛 성현 말씀이 사람이 사람스럽게 살면 신성하고 풍성하며 명예롭게 된다고 하였다. 어떻게 사람스럽고 귀하게 살 것인가. 그것은 사람에게는 가축이나 들짐승과 달리 다섯 가지의 윤리가 있다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오륜(五倫)이란 것으로 그 첫째는 부자유친이요, 그 둘째는 군신유의이며, 그 셋째는 부부유별이고 그 넷째는 장유유서이며 그 다섯째는 붕우유신이라 하였다. 이렇듯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내 주변의 관계인이란 부모형제, 직장상하간, 부부, 선후배, 친구가 전부인 것이고 이러한 관계를 친애, 옳음, 유별한 사랑, 질서있는 애정, 신의로써 하면 사람스럽고 행복하게 된다는 이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동몽선습에서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사람이 가장 귀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오륜이 있음으로서이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으로 오륜을 지켜 사람스럽게 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표현을 삼가하여 남을 언짢게 하지 않고 상냥하고 기분좋게 하는 에티켓과 예절을 지키는 도덕심이 기본이 되는 것이다. 신앙속의 자비와 사랑의 실천도 남을 언짢게 하거나 해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사람의 관계란 이해와 신뢰, 그리고 존경과 감사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직, 성실, 근면, 봉사가 요청되는 것이며 특히 표현도구로 쓰이는 눈과 입, 그리고 귀의 언어 표출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보고 가볍게 들으며 쉽게 말하지 말아라. 생각해보면 사람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란 고맙고 감사한 것, 그리고 미안하고 죄송한 것으로 대별된다. 감사해야 할 때 빨리 감사하다고 표현하지 못한다든지 미안할 때 즉시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다면 이는 상대방이 생각하기를 자기의 기대 기분에 미치지 못하였다 하여 마음이 상하게 되고 때로는 개돼지 같은 자로 마음먹게 되는 것이다.
일석아, 네 일상생활 속에서 더욱 상냥하게 인사하고, 빨리 고맙다고 하고, 즉시 죄송하다고 하여라. 그래야 상대방의 마음속에 네가 맑고 깊은 느낌으로 새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다른 한 가지는 우리 인간이 본래 남을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점이다. 친구는 삶의 동지인 것이니 작은 것으로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아라. 인간의 시기와 질투는 이기적 자기 발전의 동력이 될 수도 있으나 원대한 가치추구로서의 비교우위이어야지 소인배처럼 남을 헐뜯고 이겨먹으려는 것은 본인의 큰 발전에 근본적 에너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남이 좋은 신발을 신었다거나 어떤 친구는 집에서 그림을 그려다 주어 실기평가가 좋다고 부러워한다면 이는 얼마나 치졸한 일일 것인가. 네가 만약 네 실력이 아닌 가짜 그림을 제출한다면 많은 친구가 말은 않지만 너를 부정하고 불성실하다하여 마음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며 졸업 후에도 그 인상이 남게 될 것이니 이는 너의 장래를 위해서도 얼마나 좋지 않은 일이겠느냐? 그러니 부질없이 작은 것을 부러워하지 말아라.
지금까지 한사람이 큰일을 일구어내는 성공을 하려면 단편적 성적만이 아닌 종합적 실력이 필요하다는 점과 인생은 즐겁고 감사한 은총으로서 살아볼만한 축복이니 행복을 잘 이룩해 보라는 말을 길게 이야기하였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을 모두 이해한다 하여도 생활 속에 습관화되어 몸에 배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정진과 수양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것은 이성이나 생활 속에서는 본능적 이기와 나태가 나타나게 된다.
생활이 날 속여도 실망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하였다. 그래서 완전한 인격자인 공자께서도 일일삼성이라 하여 하루에 세 번 반성한다 하지 않았느냐? 반성이란 후회하는 것만이 아니고 전진과 희망을 기대하는 것이니 이는 지도자의 덕목 중 가장 중요한 덕목이리라.
일석아 매일 반성하고 용기를 내어 정진하여라. 차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심신을 튼튼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여 화랑도 다운 상무정신을 길러라. 오늘 아빠는 너와 같이 생각하고 꿈꾸며 한동안 행복했다.
너의 학교 교정에도 봄 생기가 가득하겠구나.
아참! 지난 겨울에 보니 느티나무 가지에 양말 한 켤레가 높이 걸려 있던데 그거 네가 장난친거 아니냐? 어쩐지 나뭇가지가 무거워 할 것 같던데...
오늘은 이만 하자. 곧 한번 짬내어 보러가마 잘 있거라.
2005. 4. 19
너를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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