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풋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네요. 요즘 저도 과 새내기들 보고 또 한일고 후배들이 연락을 하기도 해서 오랜만에 홈피 방문했습니다. 결과는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후배들이 삼 년 간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라 믿고 우선 모두 정말 수고했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요. 저도 일년에 몇 번 학교를 찾아 갈 때마다 어려운 환경에서 정말 열심히 수도승처럼 공부하는 후배들을 보면 늘 대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연락하며 지내는 후배들도 몇 명 있어서 그 녀석들과 통화하면서 잠시 동안이나마 학교에 대한 추억에 잠기기도 하구요. 대학 다니는 선배라고 괜히 어려워하지 않고 살갑게 대해 줘서 가끔은 귀찮을 때도 있지만 되도록 열심히 이야기 들어 주고 서울에 올 때면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합니다. 이 녀석들이 하는 온갖 고민들과, 가끔은 속으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자신감을 보면 과거의 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아 더 '내 새끼'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어제는 이학년 후배가 전화로 한일고 소식을 상세히 전해 주었던 터라 대충 학교 분위기가 어떨지 짐작은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글을 남길까 말까 하다가 결국 한마디 하고 가네요. 이번 대입 결과를 두고 후배들이 무척 불안해하고 있을 겁니다. 다들 처음 한일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희망과 높은 이상을 품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랬고요. 그런데 이런 후배들의 열정과 바람에 반해 이번 대입 결과는 아마도 무척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정말 두렵고 혼란스럽고 힘들겠지요. 아마 '여기에서 이렇게 공부해서 어느 대학을 가나'라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며 이러한 생각을 다른 동기들에게 전파하는(?) 후배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일 년 전만 해도 제가 그저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피상적인 말만을 후배들에게 반복했지만, 이번에는 졸업생의 입장으로 제가 한일고에서 느꼈던, 한일고 학생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대학을 와서 뼈저리게 깨우친 것은 저보다 정말 엄청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널려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한일고 친구들 중에서도 소위 날고 긴다는 동기들과 선배들이 있었지만 대학이라는 넓은 세상에 나와 보니 한일고는 전부가 아니었고, 단지 내가 한때 속했던 작은 우물 안의 세계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일고에서 일종의 ‘자기 최면’에 걸려 있었던 겁니다. 매번 모의고사가 끝나고 결과가 나올 때마다 우리 학교가 민족사관고등학교나 대원외고를 제치고 1등을 했다는 둥, 상산고나 현대 청운고는 비교를 할 가치가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일고등학교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공공연하게 접했던 터라 이렇듯 ‘자기 최면’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까닭에 모의고사 결과가 매우 나쁘게 나왔던 때도 ‘나는 최고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라는 알량한 자부심을 ‘나 자신이 최고다.’라는 엉뚱한 논리를 이끌어내는 전제로 활용한 채, 모의고사의 충격적인 결과를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현명한 후배들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하고, 또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한일고등학교라는 타이틀로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심양면으로 신경 써 주시는 고마우신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여러분의 실력만을 믿어야 합니다. 평균적인 수치에 불과한 모의고사 점수나 알량한 자부심은 단연코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평균’이라는 말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후배들이 비교의 대상으로 아마도 가장 자주 접하고 있을 민족사관고등학교나 대원외국어 고등학교를 예로 들겠습니다. 저희 과에도 대원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온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학교는 학생 수가 많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하는 질문을 던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이 말도 옳아요.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그 학교에도 상위권이 있고, 중위권이 있고, 하위권이 있다는 겁니다.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중 대개 중상위권 이상이 자신이 정말 바라던 대학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굳이 가능성이라고 한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학교의 모의고사 점수의 ‘평균’을 비교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냥 그건 학생들의 ‘평균적인 수준이 높다’라는 것을 가리키는 지표일 뿐, ‘내 자신의 실력이 높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후배들은 자신들과 경쟁할 상대가 대원외고와 같은 특목고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아마도’ 무시하고 있을 일반계 고등학교의, 상위권 학생들도 포함된다는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일반계 고등학교의 상위권 학생들을 ‘내신이나 챙기는 찌질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대학에 와서 보니 물론 이런 학생들도 소수 있기는 하지만, 일반계 상위권에서 소위 sky라 불리는 대학에 가는 학생들의 실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또 조금 뒤쳐져 있다고 해도 공부를 하던 습관이 있기 때문에 금방 성적을 올리더군요. 첨언하자면 제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법대 친구(지역균형)의 말에 따르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내신이나 챙기는 찌질이’들은 이 친구와 같은 일반계 상위권 학생들에게도 무시당한다고 합니다.
제 관점에서 솔직하게 이번 대입 결과를 살펴보면 한일고등학교에서 소위 ‘될 것 같은 녀석들’이라는 말을 들었던 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아쉬운 건 학교에서 중상위권 정도에 머물렀던 학생들이 노력한 만큼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즉, 앞에서 말한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저 또한 중상위권 정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현상은 매우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앞서 언급한 일반계 상위권 학생들의 이야기에서처럼 어느 고등학교에서나 최상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중상위권 학생들은 다릅니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제가 말한 ‘자기 최면’은 한일고등학교의 중상위권의 학생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오류를 지적한 겁니다. 만약 중상위권 학생들이 ‘자기 최면’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후배들은 하루빨리 자신을 가두고 있는 ‘한일고등학교’라는 자부심에서 빠져 나와 자신의 내실을 조용히 키우는 일이 시급합니다. 물론 자부심을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한일고등학교가 전국 최고의 고등학교라는 생각은 졸업을 한 지금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바라는 건 이 자부심을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으로 승화시키는 일입니다.
조금만 쓰고 가려고 했는데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더 하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제 블로그 주소 남겨두고 가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는 후배들은 가끔 들러서 안부게시판에 메일이나 싸이 주소 남겨주면 시간 나는 대로 능력껏 상담해 드리겠습니다.
http://blog.naver.com/jugang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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