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최용희
  작성일 : 2002년 11월 05일 10시 01분 39초

선생님 존경합니다.
다음은 한일고 선생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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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몇 시쯤 되었을까?
하긴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이제 녀석들 편지 좀 읽어야지, 창 밖으로 커다란 플라다너스잎 하나가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저 멀리 보이는 새벽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다. 3일 내내 술을 펴먹었더니 머리가 멍하다. 저기 녹슨 청동 거울 속에 허리가 꾸부정한 사내가 날 보고 웃는다. 그 모습이 서러워 나도 따라 웃는다. 웃음은 어느덧 울음으로 변하고 서러움에 흐느낀다. 마흔이 넘은 사내가 운다는 것이 신기하다. 아직도 그에겐 눈물이 남은 걸까?

아이들아!
이렇게 글로 마주하니 너희들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난 사실 일년이 무척 힘들겠구나하고 속으로 생각했단다. 왜냐하면 전 담임 선생님들께서 너무나 잘해오셨고 정이 깊이 들어서 너희와 정붙이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뿐만 아니라 여러 선생님들께서 "박 선생님 금년에 고생하시겠어요. 게네들 장난 아닙니다. 성적 요, 말도 마세요. 개교이레 최악입니다. 특히 2반은 사고뭉치들 집합소입니다."라고 하시면서 날 위로하시더라. 처음엔 장난인줄 알았지, 하지만 너희들 전년도 성적을 모두 분석하고 나니 솔직히 걱정이 되더라. 정확히 308점이더구나. 이제 죽었구나 싶었지. 그래서 난 "이건 내 힘으로는 안 된다. 뭔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신앙심도 별로 없는 돌팔이지만 너희들이 수능을 보는 날까지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기로 결심을 했단다. 한번은 우리집사람이 뭔가 이상한가 당신 요즘 무슨 고민 있냐고 묻더라. 기도는 고사하고 예배당에도 잘 안 나가는 놈이 아침저녁으로 침대머리에서 기도를 드리니 이상했던 모양이더라.

아울러 몇 가지 계획을 세웠지. 첫째 이 녀석들은 초반에 기선을 잡아야한다. 그때부터 정확히 무려 한달 가까이 온갖 감언이설, 협박과 공갈, 인상쓰기, 웃지 않기, 엄하게 하기 등등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서 너희들을 잡아 돌렸지. 그랬더니 반분위기가 조금 나아지는 것 같더라. 아마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는 학생들이 있을 거야. "아니 선배들한테 들은 거 하고는 전혀 딴판이잖아.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땐 반분위기를 공부하는 쪽으로 이끌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두 번째로 한일은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되기 때문에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학습을 시켜야되겠다고 생각했단다. 다행히 많은 인내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지루하고 따분한 일 이었지만 너희들이 잘 따랐고 성적도 점점 나아지더라. 정말로 고맙게 생각한다.

아이들아!
지금 난 마치 자욱한 아침 안개 낀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내가 겪은 좌절보다 너희들의 고통과 절망이 훨씬 더 컸을 텐데 너희들 편지 읽으면서 내가 위로를 받는구나. 사실 수능이 끝나고 가채점 점수를 받아보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단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한 현기증이 나는구나. 어떤 면에선 나같이 스트레스 잘 받고 꼼꼼한 녀석은 고3담임을 해서는 안된 단다. 누군가 내게 그러더라 "시험을 잘 보는 아이도 있고 못 보는 사람도 있지 어떻게 모든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느냐고." 그래 맞는 말이야. 하지만 하루하루를 오로지 수능을 위해서 노력하고 애쓴 너희들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허망하다는 생각을 떨쳐 벌릴 수가 없구나. "왜 내가 좀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애쓰고 노력했더라면 아이들이 더 잘나왔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자신에 대한 회한 때문에 잠을 설치고 술을 마셨단다.

아이들아!
하지만 난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단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수능 차체가 어려웠고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우리학교의 성적이 타학교에 비해서 잘나왔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다행이구나. 물론 개개인의 기대치에는 못 미치겠지만 우리 모두 최선을 다했고 많은 시간을 인내하며 참고 견디어왔으니 스스로 위로하고 주어진 여건 하에서 방법을 찾기로 하자. 설령 정시에서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기로 하자. 우린 아직 젊잖아, 아직 좌절하거나 실망하기엔 해야할 일이 너무 많고 가야할 길이 멀지 않니, 눈에서 피눈물이 나고 살이 찢기고 손톱이 빠지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하다하다 안되면 다시 하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포기하거나 멈추지는 말기로 하자. 잘나거나 똑똑하진 못하지만 너희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선생님이 곁에 있잖아, 힘들고 어려우면 손을 내밀렴, 우리 함께 손잡고 좀더 크고 멋진 세상을 향해서 힘껏 뛰어보자, 이담에 다시 만났을 때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환경이나 현실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면서 살자. 너희의 꿈을 향해서 한쪽 어깨엔 중국대륙을 다른 쪽엔 유럽대륙을 걸머지고 부리엔 태평양을 머금고 하늘 높이 한 마리 황금 독수리 되어 힘껏 솟아보렴.

아이들아!
이제 너희들을 만날 날도 얼마 안 남았구나. 그 동안 수능 준비하느라 못 다한 많은 말들을 한 오라기의 가식도 없이 지금부터라도 하고싶구나. 너희의 고통과 고뇌의 만분의 일이라도 덜어주고 싶고 너희들을 좀더 이해하고 가까이 가고 싶구나. 내게 기회를 주렴. 남은 기간동안이라도 좀더 나은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하련다. 새벽 4시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너희들 생각에 잠은 안 오지만 내일을 위해서 자야겠다. 멀리 길가에 가로등도 이제 나처럼 지친 모양이다. 새벽바람에 갈잎이 날리고 너희들의 모습 하나 하나가 잔상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너희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안녕


2001. 11. 13. 새벽에
너희들 모두를 사랑하는 선생님이 쓴다.